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상하이 사변 (문단 편집) == 배경 ==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천황과 내각의 재가도 받지 않고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장쉐량]](張學良, 장학량)의 오판에 힘입어 순식간에 만주를 점령한 바가 있었다. 만주사변을 주도해낸 관동군 과격파들은 만주를 아예 중국에서 분리하여 괴뢰국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본국은 중국의 만주에 대한 명목상 주권을 인정하자는 입장이었지만 이런 과격파 일당들은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와 마찬가지로 본국의 말 따위는 듣지 않았다.(...) 이들은 장쉐량의 정적인 만주 구파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푸이]]를 데려와서 [[만주국]]을 수립하려 했는데 벌건 대낮에 눈뜨고 영토를 침략당한 중국의 반발과 국제사회의 이목을 의식하여 이를 바로 추진하기 어려웠다. 이에 일본은 만주국 수립 과정에서 세간의 이목을 돌려보기 위해 유럽 열강의 이권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상하이에서 사고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당시 [[상하이]]는 세계 15대 도시, 아시아에서 2번째로 큰 경제대도시였는데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이 조계지를 설치하고 막대한 양의 자본을[* 영국이 5억 3400만 위안, 일본이 3억 8천만 위안, 미국이 1억 6300만 위안, 프랑스가 1억 300만 위안을 투자했다.] 투자한 곳이었다. 일본이 원하는 이목집중이라고 하는 과제를 달성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1931년 10월 11월 상하이의 일본인들은 상하이 거류민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양쯔강]]유역 일본인 연합대회, 전중국 일본인 거류민 대회 등을 열어 포악한 지나를 응징하라고 난동을 부렸다. 이 때문에 만주사변으로 어그로가 오를대로 올라 있던 중국인들의 반일감정 역시 치솟아서 일본인과 중국인의 충돌이 연일 벌어졌는데 이런 점 때문에 일본 군부는 상하이를 주목하게 되었다. 관동군과 일본 군부의 강경파 다나카 류키치,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은 폭력사태를 사주하여 만주국 설립을 위해 상하이에서 소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분란을 획책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